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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거리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다 ②] 유신과 저항 — 군부독재 시대의 빛과 그림자

by fondest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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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했다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시민들은 곧 새로운 시련을 맞이했다. 권력은 다른 이름으로, 더 강력한 형태로 되돌아왔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신체제, 헌법 위에 선 권력

박정희 정권은 처음엔 ‘구국의 결단’이라며 등장했지만, 점차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헌법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그는 국민의 저항과 국제 정세의 압박 속에서도 유신헌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이 헌법은 대통령의 직선제를 없애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관을 만들어 박정희 자신이 계속 대통령에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긴급조치권을 통해 법과 국회 위에 군림하며 모든 반대의 목소리를 ‘국가 위협’으로 규정했다.

대학생들은 이 부조리를 비판하며 거리로 나왔고, 지식인들은 감옥에 갔으며, 언론은 철저히 침묵을 강요받았다.
“민주주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독재는 총으로 시작해, 공포로 유지된다’

1979년, 부마항쟁을 비롯한 시민의 분노가 쌓이면서 결국 박정희는 측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됐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회복되기도 전에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일어섰다. 이들은 대학생, 노동자, 자영업자, 주부, 고등학생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투입,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고한 시민이, 학생이, 어린이가 총탄에 쓰러졌다. 진실은 오랫동안 은폐되었고, 왜곡되었으며,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광주를 외면하지 말라"

광주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외면당한 진실이었지만,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이후 서울의 대학가에서, 노동 현장에서,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자’는 외침이 퍼졌고, 이는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로 이어진다.

5.18은 실패한 저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불의에 맞설 이유와 방법을 남긴 불씨였다.


민주주의의 그림자와 빛

군부독재 시절은 민주주의가 억눌린 시대였다. 그러나 그 안에도 꺼지지 않는 희망이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명동성당에서, 대학 강의실과 공장의 식당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용기를 냈고, 기억을 공유했고, 저항을 이어갔다.

그것이 바로 이 시기의 이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함께 일어서는 사람들의 연대로 살아남았다.


다음 이야기 예고

3편에서는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그리고 문민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을 다룰 예정이야.
우리는 어떻게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민주주의를 제도로 정착시켰을까?

👉 [3편: 1987년과 그 이후 — 우리가 직접 만든 민주주의]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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